이산가족 이야기

가족 이야기

정장덕님의 이야기

“ 형님!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다. ”
정장덕님의 사연

제5차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찍은 가족사진

여기, 조금은 특별한 이산가족이 있습니다.

1968년 4월 17일, 동해상에서 조업중이었던 형은 납북된 뒤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 형과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동생, 정장덕씨입니다.

동생의 기억 속에 형은 누군가가 버린 자전거를 새 것처럼 고쳐서 타고 다닐 정도로 손재주가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정장덕님의 형제 정장백님이 북에서 이룬 가계에 대한 메모가난했던 시절, 집안을 돕기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듬직한 형이었습니다.

고된 농사일을 그만두고 배를 타기 위해 떠난 그 길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장백씨에게 배를 타보라고 권유했던 어머니는 모든 것이 당신의 탓인 것 같아, 34년을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우여곡절끝에 형의 생사를 확인하게 된 동생 장덕씨는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고, 2002년 9월, 5차 이산가족 상봉이 치러진 금강산에서 형 장백씨와 그의 어머니가 극적인 상봉을 이뤘습니다.

"어머니!" 하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어머니는 한없이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정장덕님의 형제 정장백님의 북측 가족사진어머니는 아들에게 건네 줄 선물로 현금을 가져갔지만, 장백씨는 그것을 받지 않고 어머니의 손에 고스란히 돌려주었습니다. 형의 기억도 34년전에 머물러 있는 듯, 남한의 가족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배려였습니다.

물론, 장덕씨의 가족들이 쉽게 가난을 벗어난 건 아니었습니다. 어선이 피랍된 후, 장백씨가 북한 방송에 출연해 '자진 월북'을 발표했고, 그 때문에 중앙정보부 등에서 감시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장덕씨는 감시를 피해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 다녀야 했고, 서울의 한 중국집에서도 쫓겨나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왔습니다.

장덕씨는 아직 형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아쉽게도 어머니만 상봉 대상자로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정장덕님의 사진

하지만 장백씨는 어머니라도 34년의 맺힌 한을 풀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형을 만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모습으로 노환없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장덕씨는 다음 이산가족 상봉에는 형을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형을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남한의 가족들은 다 잘 살고 있느니, 함께 사는 그날이 올 때까지 형도 아무 걱정없이 잘 살아 달라고 말입니다.

정장덕님의 구술 이야기

정장덕님의 구술 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