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길림성 유화현 오구 대전자 툰에서 살았던 이**(67)씨가 한국에 머물고 있는 딸 라**씨게에 보낸 편지입니다. 라**씨의 부탁으로 그녀의 외할머니를 찾기 위해 이 글을 올립니다. 이**씨는 그분 가족의 내력과 그간에 있었던 일을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혹씨 오**씨 할머니를 알고 계신분이나 그분의 가족은 라**(010-****-****)씨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라광녀에게! 참 세월이 빠르기도 하구나 … … 중략 … … 우리 외가집의 내력은 외할아버지 성함이 오**, 외할머니는 신**, 그리고 우리 엄마는 외활머니의 넷째딸(오**)으로 태어났는데, 애명은 오끝놈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 후 아들을 나았는데, 이름을 오**이라고고 부르고 그 다음에 딸을 나았는데 오**, 또 아들 오**, 그리고 망내딸이 오**인데, 나보다 한 살 작아 66세다. 우리 집의 내력은 우리 아버지가 맞아들이고 그 다음에 우리 작은아버지 리**, 또 리**, 또 리**, 애명은 **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와 한국에서 결혼할 때 16세였는데, 17세에 나를 놓고 내가 첫돌이 지났을 때 중국 대전자라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대전자에서 우리 외가집하고 한동네에서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세살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후 우리 어머니가 일본시대에 복천(지금의 심양)이란 곳으로 친구들과 같이 공장에 일자리를 찾으러 간다고 갔다가, 친구들은 돌아오고 우리 어머니는 그곳에서 남편을 얻었는데, 정씨라고 하는 분과 결혼을 했다. 그 후에도 대전자 우리 외가집에 두서너 번 왔는데, 내 옷도 많이 사가지고 오고, 우리 큰 외삼춘 오호섭의 결혼식에도 참가했다. 한국하고 길이 막히기 전에 한국으로 나갔는데, 한국 대구라는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 때 우리 큰 외삼촌 오호섭이도 한국에 가서 우리 어머니가 있는 곳에 같이 있다가 중국으로 왔다고 한다. 큰 외삼촌은 살아계실 때 항상 나보고 하시는 말씀이 “점복아 한국하고 길이 열리면 너희 엄마를 찾아주겠다”면서 “너희 어머니 살고 있는 집까지 알고 있다”고 하셨단다. 만약 우리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나는 ‘어머니’ 한 번 불러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 2004년 11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