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은 남측에 사는 고덕균 님이 북측에 사는 이산가족을 찾는 영상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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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남측에 사는 고덕균 님이
북측에 사는 누나 고인수, 고인자, 큰아버님 고명봉님의 식구들을 찾는 영상편지입니다
[본인소개[
제 이름은 고덕균이고 나이는 만 70살입니다
저는 인천에서 태어났어요
누나들이랑은 얼굴도 모릅니다
아버님하고 어머니 고향은 강화예요
[가족소개]
제 아버지 성함은 고화봉이고 어머니 성함은 전정순입니다
아버지는 1918년, 어머니는 1917년에 태어나셨습니다
돌아가신 지 꽤 오래됐어요
큰아버지 성함은 고명봉입니다
큰아버지의 형제들이 고두순씨도 있고 제가 여러 번 들었는데 기억을 다 못하는데 사촌 누님이 고아자 등 여럿 있어요
가족이 아주 많아요
근데 다 기억을 못 하네요
[찾는 사람]
찾는 사람은 친누님인 고인수, 고인자입니다
두 누님 중 한 사람은 6·25 때 죽었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누님 중 한 사람이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전거 뒷바퀴에 발뒤꿈치가 끼어서 아주 심하게 다쳐서 흉터로 남아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고향이야기]
고향 개성 거기는 6·25 전에는 휴전선이 바로 마당 앞으로 지나갔대요
거기가 3·8선의 경계선이었죠
6·25 때 소련군도 거기에 왔었고 인민군도 다녀갔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거기가 개성여중인가 붙어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헤어진 사연]
헤어진 사연은 우리 큰아버님이 개성에서 석회 공장을 크게 하셨대요
그래서 많은 일꾼들이 있었고 일손이 필요하고 관리자도 필요하니까 우리 아버님이 가서 도와주시려는 의논을 하러 갔었나봐요
그런데 전쟁 상황이 되어버리니까 거기에 계속 있지는 못하고 결국은 1·4후퇴 때 오게 된 그런 상황이 된 거죠
[헤어진 후의 삶]
우리 아버지는 강화가 고향이니까 오셔서 강화에 계시다가 큰형님이 자라서 크니까 학교를 인천중학교를 다녔고 그랬다가 서울사대부고를 다녔어요
그리고 우리 외삼촌네가 먼저 서울에 오시게 돼서 서울에 와서 살게 됐죠
그래서 지금까지 서울에서 계속 살았어요
[찾아보려는 노력은?]
우리가 직접 찾아보지는 못하고 중국 조선족들을 통해서 한번 알아본 적은 있는데 그분들이 믿음성이 없었어요
알아봐 준다고 왔다 갔다 하다가 지속이 안 됐어요
[현재 가족]
현재 가족은 큰형님네가 계시고 둘째 형님 고송균, 저는 막내 고덕균입니다
큰형님네는 하남에 사시고 저는 위례에 살고 있고요
작은형님은 경기도 광주에 살고 계시고 우리 3형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업을 같이 해와서 지금도 같이 하고 있어요
탑 전자산업이라고 파이프 인스펙션 카메라 장비라고 해서 주로 하수도 내부를 카메라로 촬영하는 촬영 장비를 만들어 파는 탑 전자산업이라는 회사를 같이 운영을 하고 있어요
[영상편지]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왕래도 안 되고 KBS에서 이산가족 만나게 해주려고 애를 많이 쓰셨는데 결국은 북한 정권이 왕래를 자꾸 막고 이러는 바람에 결국은 왕래가 안 됐죠
때때로 여러 차례 말씀도 듣고 또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꽤 됐고 큰형님은 누님들이 동생이니까 부모님들 얘기하시는 거 이상으로 보고 싶다고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지금은 연세가 드셔서 치매 증상이 좀 심해요
기억도 잘 못 하시고 그런 상태까지 됐는데 치매 되시기 전까지 계속 북한에 가고 싶다 또는 내가 없어지면 북한에 가는 줄 알아라 이런 정도까지 얘기를 많이 하시고 자주 눈물도 흘리고 그러셨어요
하루속히 북한하고 왕래가 된다든가 통일이 된다든가 그래서 볼 수 있으면 너무 좋겠어요
또 계속 그런 말씀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저도 뭐 그냥 늘 생각을 하고 있죠
지금 누님들도 연세가 80세가 되셨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는 만나 봬도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가 됐을 테고 그런 상태가 돼서 너무 안타깝고 그래도 큰아버지네 식구들도 계시고 자손들이 있을 테니까 하여튼 가족들이 만났으면 너무 좋겠습니다
여기 있는 가족들은 오랫동안 사업도 꾸려가면서 잘 지내고 있고요
항상 우리 누님들과 큰아버지의 식구들 다 만나보기를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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